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더 베스트 텐 (문단 편집) === 랭킹 선정 방식 === 라디오처럼 당시 40엔의 엽서에 사연과 신청곡을 적고 보내는 것이 시청자들과 더 베스트 텐의 소통창구.[* 당시 음악 프로그램은 프로듀서가 섭외권을 장악하던 시대라 인기나 유명함에 상관없이 거물 연예인을 매주 출연시키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이었다. ~~방송의 작은 독재자~~] 그 외에도 음반매장에서 기록되는 매주 음반 판매 데이터, 라디오 방송국의 신청곡 횟수[* 자사의 [[TBS라디오|라디오 방송국]]이 있으니까 쉽게 수집할 수 있다.], 유선방송 신청곡 랭킹 등 이 모든 데이터를 컴퓨터로 계산해 종합 랭킹 순위를 결정한다. 출연하는 가수들은 1위~ 10위 이내에 선정된 가수들만 출연한다. 간혹 가수들이 새 싱글 녹음이나 행사, 일정으로 나오기가 곤란한 상황도 있어 쿠메 히로시가 죄송하다고 90도로 숙여 사과한다. 발표하는 차트에 상당한 공정성과 공신력이 있었다. 대표적인 예로 첫 회에 [[야마구치 모모에]]가 11위에 오르자 [[CP]]가 "노래 프로그램, 게다가 새로운 프로그램에서 야마구치 모모에를 등장시키지 않을수가 있나. 다른 가수와 바꿔라"라고 말하며 다른 가수와 바꿔서 모모에를 출연시키자고 연출 프로듀서에게 제의했지만 연출 프로듀서 야마다가 "그럴 수 없습니다"라고 말하며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. 쿠로야나기 테츠코가 진행자로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순위 조작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이 붙어져 조작을 할 수가 없었다. [[https://www.news-postseven.com/archives/20220108_1718449.html?DETAIL|#]] 매해 연말에는 연간 차트를 집계해 발표했는데, 집계 방식은 빌보드와 오리콘 연간 차트처럼 한 해 동안 순위권에 진입한 모든 곡들의 총 득점을 합산하는 방식을 채택했다. 따라서 단기간에 엄청난 임팩트를 남긴 곡보다 오랜 시간 사랑 받은 곡들이 높은 순위에 들었고, 특히 잔잔하지만 인기의 주기가 긴 [[엔카]]에게 유리했다. 실제로 그 해 최다 1위곡이 베스트 텐 연간 차트 1위를 차지한 경우는 단 3번에 그쳤고,[* 1978년, 1981년, 1985년.] 엔카가 연간 1위에 오른 경우는 무려 6번에 달한다.[* 1979년, 1980년, 1982년, 1983년, 1984년, 1987년.][* 참고로 12년 동안 주간 1위를 차지한 엔카는 이츠키 히로시의 'おまえとふたり(당신과 둘이서)', 요시 이쿠조의 '雪國(설국)' 단 2곡이며 횟수로는 총 603회 중 단 3회에 불과하다.] 심지어 1987년에는 1년 동안 단 한번도 10위권에 들지 못한 노래가 연간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.[* 세가와 에이코(瀬川瑛子)의 '命くれない'라는 곡으로, 1986년 3월 발매 후 이렇다 할 반응을 얻지 못하다가 1987년 유선방송을 중심으로 인기몰이를 하면서 1년 내내 2~30위권을 지킨 끝에 연간 2위를 기록했고, 이듬해 1월에는 주간 8위까지 상승했다.][* 비슷한 예로 1984년 역시 한번도 10위권에 들지 못한 아시야 간노스케(芦屋雁之助)의 '딸아(娘よ)'가 연간 차트 9위에 올랐다. 이 노래는 이후에도 주간 10위권 내에 들지 못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